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조선 궁궐 중 자연과의 조화가 가장 빼어난 창덕궁을 찾았습니다. 인위적인 직선 대신 북악산 매봉의 완만한 능선을 그대로 살려 전각을 배치한 창덕궁은, 사계절 중에서도 가을빛이 감돌기 시작할 때 비밀의 정원 '후원(비원)'의 진정한 정취를 보여줍니다.
자연의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지어 올린 창덕궁 인정전의 웅장한 기품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가장 먼저 위풍당당한 인정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른 궁궐들이 엄격한 좌우 대칭 축을 고집한 반면,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순응하여 곡선형으로 전각들을 유기적으로 배치했습니다. 조정의 품계석 너머로 올려다본 인정전의 팔작지붕과 그 뒤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의 능선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처럼 맞물리는 전경은 언제 보아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연꽃 향기 머무는 네모난 연못 부용지와 규장각 주합루의 고요
후원 특별 관람 안내원을 따라 숲길 언덕을 넘어서자 눈앞에 거짓말처럼 부용지 권역이 펼쳐졌습니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동그란 인공 섬을 띄운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조선의 우주관을 형상화한 곳입니다. 연못 물가에 발을 담그듯 세워진 독특한 십자형 부용정과, 언덕 위에서 연못을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왕립도서관 규장각 주합루의 균형미는 보는 이를 완전히 압도합니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개혁 군주로서 젊은 실학자들과 밤낮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다듬었던 곳이 바로 이 주합루 1층 규장각이었습니다. 고요한 수면 위로 내려앉은 처마 그림자를 바라보며, 200여 년 전 이 정원을 거닐었을 군신들의 고뇌와 열정을 가만히 되새겨 보았습니다.
불로문 돌문을 지나 만나는 애련지의 단아하고 그윽한 정취
부용지를 지나 북쪽 숲길로 발걸음을 옮기면 거대한 통돌을 깎아 만든 '불로문(不老門)'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옛 왕실의 소망을 담은 문인데, 통돌 문틀 아래를 조심스레 지나면 곧바로 애련지와 애련정의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숙종이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깨끗한 군자의 품성을 지녔다'며 사랑했던 애련정은, 화려한 단청을 뽐내는 대신 소박한 단칸짜리 정자로 자연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정자 난간에 기대어 바람결에 잔잔히 흔들리는 수련 잎을 바라보는 순간, 도심 한복판에 이런 깊은 적막이 숨어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탄하게 됩니다.
창덕궁 서쪽 담장을 따라 걷는 원서동 골목길과 오랜 공방의 정취
궁궐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창덕궁 서쪽 담벼락을 끼고 이어지는 원서동 공방길로 동선을 이어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대대로 궁궐의 일을 돌보던 궁녀와 하급 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이곳은, 화려한 고관대작의 북촌 가회동과는 또 다른 수수하고 정겨운 골목 정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담벼락 끝에는 궁녀들이 쌀을 씻고 흘려보낸 맑은 물에 서민들이 빨래를 했다는 '원서동 빨래터' 옛 터가 남아있으며, 골목 곳곳에는 한복 장인과 전통 매듭 공방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소박한 한국 전통의 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습니다.
기름떡볶이의 고소한 향과 엽전 도시락으로 채우는 통인시장의 미식
원서동과 삼청동을 가로질러 경복궁 서쪽의 '서촌'으로 넘어가면, 서울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전통시장 중 하나인 통인시장을 만나게 됩니다. 엽전으로 교환해 시장 곳곳의 반찬을 골라 담는 '엽전 도시락' 카페도 재미있지만, 이곳의 절대적인 주인공은 쇠솥에 들기름을 두르고 고춧가루 양념으로 바짝 볶아내는 원조 '기름떡볶이'입니다.
국물 없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게 볶아진 고추장 기름떡볶이와 맵지 않고 고소한 간장 기름떡볶이를 반반 섞어 주문해 한 입 넣으면, 기름의 감칠맛과 떡의 구수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지며 몇 시간 동안 걸었던 도보 여행의 피로를 한순간에 씻어내 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창덕궁 후원(비원) 관람은 당일 현장 구매가 가능한가요? A. 후원은 문화재 보존을 위해 회차당 정원(100명) 제한이 있으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한 사전 온라인 예매(회차당 50명)가 필수 권장됩니다. 잔여 수량 50매에 한해 당일 아침 9시 매표소에서 현장 선착순 판매되므로 오전 일찍 방문하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Q. 창덕궁 관람 후 서촌 통인시장까지 이동 동선은 어떻게 되나요? A. 창덕궁 정문(돈화문)에서 북촌 계동길과 북촌한옥마을을 거쳐 삼청동을 지난 뒤, 청와대 앞길을 건너 서촌 통인시장까지 도보로 약 30~40분 소요됩니다. 걷는 내내 한옥 돌담길과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이어져 서울 도심 최고의 힐링 도보 산책 코스입니다.


